
전날 마셨던 술이 숙취보다 잔상을 남기는 날이 있다.님만해민의 밤은 조용했고 나는 한 모금씩 천천히 마셨다. 기분 좋은 알코올은 말을 줄였고 침묵은 도시와 나를 잘 어울리게 만들었다.그리고 다음 날, 그 여운은 아침의 공기처럼 가볍지만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느릿한 아침, 그리고 천천히 열리는 눈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살은 기분 좋게 둔했다. 몸은 무겁지 않았지만, 속은 조용히 '따뜻함'을 찾고 있었다.목이 마르진 않았고 배가 고프지도 않았지만 무언가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필요했다.조용히 옷을 입고 슬리퍼를 끌고 나왔다. 거리는 여전히 정적에 가까웠고, 오토바이 소리도 아주 멀게 느껴졌다.☕ 9:00AM – Nine One Coffee, 커피로 몸을 깨우다님만해민 소이 11 골목 안쪽, Nine One..

여행 중 가장 좋은 한 끼는 늘 ‘혼자서 먹는 늦은 점심’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 술 한잔이 있다면 그건 그날 하루를 위한 가장 조용한 예고편이 되곤 한다.치앙마이, 님만해민. 이번엔 아침 카페 대신 낮술로 하루를 시작해 보기로 했다.🍷 11:30AM – *Rustic & Blue*, 늦은 아침과 와인 한잔산뜻한 공기에 어울리는 골목을 따라 Rustic & Blue - The Farm Shop으로 향했다. 님만해민 소이 7 골목 안, 반쯤 열린 목재문과 테라코타색 벽, 그곳에서 브런치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Chilled wine available all day”라는 손글씨 메뉴였다.오픈 에어 자리에 앉아 스파클링 와인 한 잔과 시금치 치즈 토스트를 주문했다. 태국의 햇살 아래 가볍게 올라오는 탄산..

여행 중 숙소를 옮길 땐 보통 더 나은 편의, 더 좋은 위치, 더 예쁜 인테리어를 기대하게 된다.하지만 나는 이번에, 그 반대 이유로 숙소를 옮겼다.첫 번째 숙소는 너무 정리되어 있었다. 너무 친절했고, 너무 정직했고, 너무 완벽했다. 침대 위 쿠션도, 테이블 위 꽃병도 사진처럼 정확했지만 이상하게… 나는 계속 앉아 있기가 불편했다.그래서 짐을 채 다 풀지도 않은 채, 이틀 만에 다른 숙소로 옮기기로 했다. 위치는 조금 더 외곽이었고, 사진은 흐릿했고, 후기도 적었다.🚪 두 번째 숙소의 첫 순간문을 열었을 때, 그 방은 약간 어두웠다. 창문은 커튼 반쯤 가려져 있었고 햇빛이 모서리 벽을 조용히 물들이고 있었다.에어컨은 켜지지 않았고 선풍기만 천천히 돌고 있었다. 벽엔 그림 하나, 그림자 둘.그 순간, ..

떠나기로 했다. 이번 여행엔 어디를 갈지도, 무엇을 할지도 똑바로 정해두지 않았다.단 하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여행이길 바랐다.그래서 짐을 쌀 때도 여느 때와 달랐다. 수건, 여권, 파우치… 그건 기본. 정말 필요한 건 그보다 더 가벼운 것들이었다.🎒 천천히 걷기 위한 신발 한 켤레가볍고 말랑한 운동화 하나. 속도를 낼 수 없는 신발. 오히려 발을 느리게 만들어주는 구두 같은 것.이번 여행엔 골목마다 멈추고 싶을 테니까. 카페 앞 화분, 유리창 너머 책방, 그럴 때마다 발이 말을 들어야 하니까.📓 안 써도 좋은 노트 한 권어쩌면 아무것도 쓰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들고는 간다. 낮잠을 자다가 떠오른 말 한 줄, 카페 창가에 앉아 훑은 생각 하나.꼭 무언가를 기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도..

여행이란 늘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고, 어떤 사진을 찍어야만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문득 지겨워졌던 어느 날, 나는 아무 계획 없이 치앙마이에 며칠 묵기로 했다.그리고 그중 하루는 진짜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지도도, 검색도, 알람도 꺼둔 채 오직 '지금 여기'만 따라가 보기로.🛏 조용한 침대, 어설픈 햇살, 창 너머 바람아침은 알람 없이 찾아왔다. 창문으로 흘러든 빛이 내 이불 끝자락을 타고 천천히 올라왔다.바람이 창문 너머로 들어왔다 나갔다. 어느새 방 안에 나무 냄새가 들어찼고, 나는 천장을 바라본 채 한참을 멍하니 누워 있었다.문득 휴대폰을 보았지만 무음이었다. 알림도 없었다.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커피 한 잔을 내리는 속도아파트 한 켠, 조그만 주방에서 핸드드립 커..

치앙마이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더 이상 어딘가를 부지런히 다닐 이유가 없었고, 굳이 어디를 가야 할 필요도 없었다.아침은 늦게 왔다. 그렇다고 늦잠은 아니었다. 그저,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는 날. 창문을 열자 나무 냄새가 들어왔고, 머리맡엔 커튼 사이로 햇살이 조심스럽게 스며들고 있었다.짐은 정리되어 있었고, 방은 조용했고, 나는 오늘 하루가 천천히 지나가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Ristr8to 카페에서 시작한 하루숙소를 나와 Ristr8to로 향했다. 이 골목에 머문다면 반드시 들르게 되는 유명한 카페지만, 그 유명세보다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조용한 공기가 먼저 느껴진다.바리스타가 라떼를 내릴 때, 손이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주문한 컵을 받아 바깥 자리에 앉았다. 나무 그늘 아래,..